어떻게 모두들 잘 지내시는지 궁금합니다.
작년 바쁘게 지내다가 좀 한가하니 심심하시죠?
조만간 모두 만나는 자리를 갖도록 하겠습니다.
밖에 나가보니 봄날입니다.
처음 블로그를 만든 목적은 몇몇 사람들이었는데 운영을 하다보니 사소한 일들이 생기네요.
귀찮게 해서 죄송합니다. 되도록이면 혼자만 즐겨찾기 해 놓고 가끔 들어오세요.
11. 2. 23.
거리 좁히기!
Green Sandpiper(삑삑도요)
요녀석을 관찰한지 한달 반정도 되는 것 같다. 지나가면서 오늘은 잘 있나, 뭐 하나 하면서 한동안 머물렀다 오곤 한다.
쉬기도 하고 미꾸리도 잡아먹기도 하고, 얼마전 너무 추어 물이 얼었을 때는 잠깐 보이지 않아서 더 밑으로 내려갔는지 죽었는지 걱정되기고 했었는데 몇일 후 다시 나타났다.
올 해는 여기를 본거지로 삼은 것 같다.
차에서 내리면 영락없이 도망가기 때문에 옆에가서 시동을 끄고 한참 동안 긴장 푸는 시간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내 생각엔 매일 이상한 놈이 옆에 와서 움직이지도 않고 길고 검은 걸 댔다가 사라진곤 하니 요즘은 별로 신경을 안 쓰는 것 같다.
가끔은 한 마리가 더 와서 있는데 쫒아내지는 않는다. 어떤 관계인지는 더 관찰해 봐야겠다.
11. 2. 17.
일찍 일어나는 까마귀 늦잠 자는 참새
시바타 도시타카/눈과마음
일본에 가본적은 예닐곱번 정도 되는 것 같다. 주로 시민운동단체나 기관들을 방문을 했었는데 처음 이 사람들의 친절성을 보고는 깜작 놀랐었다. 몇번 더 방문을 하면서 보이는 게 다는 아니라는 생각도 좀 하긴 했지만...
최소한 진짜 속마음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타인에 대한 예의는 최대한 지킬려고 하는게 피부에 각인돼 있는 것 같긴 하다.
여러단체를 방문해 보면서 일본 야조회를 방문한 적이 있다.
헉..
가장 놀란 건 탐조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과 노력이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야조회 같은 경우 회원이 5만(?)인가 되는데 한 번 조사하면 전국동시센서스가 될 정도이다.
제일 부러운 게 조류관련 서적이나 홍보물, 상품 등이 엄청나다.
우리나라에서는 새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게 얼마되지 않고 서적 또한 도감 형태의 책이 대부분이라서 별 흥미를 갖기 어렵고, 국가기관에서나 연구가 이뤄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지금은 도감류의 책은 우리나라도 많이 나와 있는데 그 책이 그책이다. 몸길이가 몇 센치이고 어느 계절에 오고 하는 게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어 아쉬운 게 많다.
이 책을 찾는 데 엄청 힘들었다. 절판이 되서 팔지도 않고 중고서적을 뒤져서 찾았는데 새에 대한 문화적 접근을 하면서 글을 써 나갔는데 신선하고 재미있다.
새에게도 감정이나 정서가 있는가,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느낄 수 있는가..
11. 2. 12.
11. 2. 11.
유부도 이야기 1
한 번 읽어보세요!
서천연안 인근에는 십여 개의 섬이 있는데 유부도에만 사람이 거주한다. 현재 30여 가구가 거주를 하고 있다. 장항에서는 배를 타고 20여분 걸리는데 정기적으로 가는 배는 없다. 그래서 들어가려면 군산으로 가서 마을 분들의 배를 타고 들어간다.
줄 곳 유부도를 많이 다녔는데 제작년부터 유부도 주민들을 대상으로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살면서 어려운 점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앞으로의 모습들에 대해 인터뷰와 모니터링을 하면서 보고서를 매년 만들고 있다. 2009년에는 군수를 비롯한 행정공무원과 단체, 주민들이 교회에 모여 유부도에 대한 토론과 고민을 하기도 했다.
이런 이유는 유부도가 지역적으로나 세계적으로 아주 중요한 생태적 지위에 있고 유부도 주민뿐만 아니라 서천주민, 나아가서는 국가적으로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지속가능한 보전과 이용을 위해 이해당사자들이 머리를 맞댈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부도에 대한 생태환경과 삶을 지속적으로 살펴보고 섬 주민들에게 필요한 것, 지역사회단체가 제시하는 것, 서천군이 정책적으로 추진하려고 하는 것들이 한데 모여지고 토론이 되어야 비로소 유부도의 바람직한 보전과 섬 주민들의 삶을 질 향상을 기대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유부도 사람들이 섬에 들어와서 살게 된 이유를 시기와 문화를 조명해 본다.
유부도는 서천군 장항읍 송림리에 속한 섬이다. 장항에서 5㎞ 정도 떨어져 있지만 실제는 군산과 불과 1㎞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주민들은 군산과 장항을 생활권으로 하고 있다. 면적은 0.77㎢이며 갯벌을 포함하면 약 200만평에 가까운 섬이다. 현재 인구는 33가구에 60여명이 생활하고 있다. 유부도는 해발 40m 정도의 오이형태의 산이 동쪽에 자리하고 있고 그 서쪽으로 긴 사구가 발달되어 있다.
유부도에는 유부도 조개무지, 유부도 전통 떼집, 유부도 인구 유입의 원인이 되었던 유부도 염전이 남아 있다. 유부도에 입도하게 된 마을 주민 조사에서는 크게 1960년 이전에 입도한 시대와 그 이후 시대로 나눌 수 있었다. 1960년 이전 유부도에 입도한 사람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어민으로 입도하였다. 1960년 이후 입도한 사람들은 염전, 김, 수심원과 관련하여 입도하였다.
1965년에 입도한 조현상씨에 의하면 염전을 만들기 위하여 입도를 하였는데 그때 7가구 10여명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7가구는 정재봉, 박기수, 배노수, 신봉남, 지종찬, 김영렬, 신상길 씨댁이다. 1965년도에 조남두, 조남호, 김관치, 서석형씨가 염전을 만들면서 노동인구 유입되어 350여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 후 1980년대 김 양식의 활성화와 수심원의 운영으로 인구가 늘었다가 일자리가 사라지자 급격하게 인구가 감소하였다.
교육
송림초등학교에서 파견된 선생님 2분이 5명의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2011년 현재는 학생수가 줄었다). 유부도 분교는 1973년 4월 1일 개교하여 현재까지 꾸준히 유부도 학생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교사 1동과 최근에 새로 지은 선생님 숙소 1동, 그리고 한때 인구가 많은 때 유부도 파출소가 있던 폐건물 1동이 있다. 운동장에는 유부도 특유의 식물이 자라고 있어 자연스런 잔디 구장이다. 주변에는 해당화가 담장을 이루고 있다. 김 양식이 활성화되었을 때는 단오를 즈음해 유부도의 날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유부도 사람들의 교육을 위하여 노력한 흔적이 있다. 1970년대 군산에 사는 강경식씨가 건너와 야문이네, 고학순씨네를 전전하며 밤에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소위 말하는 야학시대이다. 그 후 수심원이 생기면서 수심원에서 수업을 하다 학교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수심원 원장 최판씨가 교육기관에 건의를 하여 유부도 분교가 마련되었다고 한다. 유부도 사람들이 기억하는 선생님은 석순태, 양을준, 김시연 교사였다. 이들은 마을 주민들과 대화를 많이 하고 주민들의 애로 사항을 해결해주는 해결사 역할을 하였다.
바닷바람에 견뎌낸 흔적들이 역력한 학교 건물만큼이나 학생들의 꿈도 이곳에서 자랐을 것이다. 현재 재학 중인 영철이는 바다와 철새가 좋다고 하였다. 조사자의 바람이 있다면 유부도 분교에 근무하는 선생님께서 직접 유부도의 환경과 철새 그리고 주민들을 조사 연구하여 유부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교육이 이루어지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 송림초등학교 유부도 분교
종교
유부도에는 갈릴리 교회와 소망교회 2개가 있다. 갈릴리 교회는 1970년 한 전도사에 의하여 설립되었으며 소망교회는 주민 박창구씨의 딸 박경숙씨가 사역하고 있다. 갈릴리 교회에는 군산과 장항을 오고가는 배를 구입하여 운영하고 있다. 현재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교회 신자이다. 특별히 유부도에서 행해지는 종교 활동은 조사할 수 없었다. 단지 교회가 들어오기 전에는 조앙신이나 뱃고사 정도의 의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교통
선착장은 본래 “줄려고랑”이라고 하여 섬의 북사면에 있었다. 선착장까지 가려면 주민들의 불편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마을에서 북사면 갯벌을 따라 물길이 있는 곳까지 내려가야 했다. 그리하여 마을과 가까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두 번째 부두라고 할 수 있다. 도류제 공사이후 선착장의 기능이 보완되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이 가구당 배를 마련하여 운항하고 있다. 없는 사람들은 배를 소유한 사람들의 일정에 맞춰 군산과 장항을 오고간다. 유부도에 들어가려면 배를 가진 사람에게 사전에 연락을 하여야한다.
▲ 장항에서 출발해 유부도로 가는 선외기
전기, 물, 쌀
얼마 전까지 유부도에는 3가지가 없었다. 술집, 물, 전기가 없는 3무 마을이었다. 지나친 음주가 마을 공동체를 붕괴시킨다고 하여 마을회의에서 술을 개인적으로 육지에 나가 사다먹을 수 는 있어도 유부도 내
부에서 팔 수 없다는 규정을 만들어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 그래서 술집이 없다.
다음으로는 유부도에 전기, 물, 쌀이 없어 불편하였다. 최근에 발전기를 설치하여 전기를 자가 발전하여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발전기를 돌려야 하기 때문에 기름을 장항에서 늘 가져와야 한다. 기름을 장항에서 가져오면 발전기가 있는 곳까지 운반하는 것은 많은 주민들의 협조가 필요하다. 그러나 선착장에서 발전실까지 운반하는 일은 매우 불편하게 하고 있다. 추운 날 기름을 운반하는 일은 너무나 가혹한 작업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마을 사람들의 안녕을 위하여 서로 봉사를 하고 있다.
물은 2009년 상수도를 설치하여 이만저만 편리한 것이 아니다. 그 이전에는 장항에서 배로 운반하여 갖다 먹었다. 지금은 자체 상수원을 마련하여 물을 공급하고 있어 너무나 편리한 생활을 하고 있다.
유부도의 농작물은 채소가 될 뿐이다. 고추, 고구마, 감자, 배추, 시금치 등 채소가 생산될 뿐 벼농사는 짓지 못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주식은 쌀과 보리는 대개 군산이나 장항에서 구입하였다. 어장을 통하여 잡힌 물고기를 내다팔아 주식인 쌀이나 보리를 얻을 수 있었다.
유부도의 가옥 “떼집”
유부도 떼집에는 지금 김정원씨가 살고 있는 집이다. 떼집은 유부도의 가옥을 잘 이해 할 수 있는 특징을 갖고 있다. 1973년에 입도한 김정원씨는 어장을 경영하였는데 살 집이 없어 직접 전통 방식으로 떼집을
지었다는 것이다. 유부도에 총 40여 가옥이 남아 있지만 유일하게 김정원씨 떼집이 남아 있다. 이 집은 방 2칸 부엌 1칸으로 3칸의 초가이다.
지금은 스레이트 지붕과 시멘트로 벽을 발랐지만 그 구조는 그대로 남아 있다. 떼집은 벽돌을 만들 수 없었던 유부도에서 떼를 벽돌처럼 떠서 싸 올린 벽에 지붕을 올린 집이다. 유부도의 환경과 생태적인 삶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앞으로 보존 가치가 있다
서천연안 인근에는 십여 개의 섬이 있는데 유부도에만 사람이 거주한다. 현재 30여 가구가 거주를 하고 있다. 장항에서는 배를 타고 20여분 걸리는데 정기적으로 가는 배는 없다. 그래서 들어가려면 군산으로 가서 마을 분들의 배를 타고 들어간다.
줄 곳 유부도를 많이 다녔는데 제작년부터 유부도 주민들을 대상으로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살면서 어려운 점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앞으로의 모습들에 대해 인터뷰와 모니터링을 하면서 보고서를 매년 만들고 있다. 2009년에는 군수를 비롯한 행정공무원과 단체, 주민들이 교회에 모여 유부도에 대한 토론과 고민을 하기도 했다.
이런 이유는 유부도가 지역적으로나 세계적으로 아주 중요한 생태적 지위에 있고 유부도 주민뿐만 아니라 서천주민, 나아가서는 국가적으로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지속가능한 보전과 이용을 위해 이해당사자들이 머리를 맞댈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부도에 대한 생태환경과 삶을 지속적으로 살펴보고 섬 주민들에게 필요한 것, 지역사회단체가 제시하는 것, 서천군이 정책적으로 추진하려고 하는 것들이 한데 모여지고 토론이 되어야 비로소 유부도의 바람직한 보전과 섬 주민들의 삶을 질 향상을 기대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유부도 사람들이 섬에 들어와서 살게 된 이유를 시기와 문화를 조명해 본다.
유부도는 서천군 장항읍 송림리에 속한 섬이다. 장항에서 5㎞ 정도 떨어져 있지만 실제는 군산과 불과 1㎞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주민들은 군산과 장항을 생활권으로 하고 있다. 면적은 0.77㎢이며 갯벌을 포함하면 약 200만평에 가까운 섬이다. 현재 인구는 33가구에 60여명이 생활하고 있다. 유부도는 해발 40m 정도의 오이형태의 산이 동쪽에 자리하고 있고 그 서쪽으로 긴 사구가 발달되어 있다.
유부도에는 유부도 조개무지, 유부도 전통 떼집, 유부도 인구 유입의 원인이 되었던 유부도 염전이 남아 있다. 유부도에 입도하게 된 마을 주민 조사에서는 크게 1960년 이전에 입도한 시대와 그 이후 시대로 나눌 수 있었다. 1960년 이전 유부도에 입도한 사람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어민으로 입도하였다. 1960년 이후 입도한 사람들은 염전, 김, 수심원과 관련하여 입도하였다.
▲ 항공사진으로 본 유부도 |
인구
유부도에는 현재 반장 조현상씨를 비롯하여 37세대 60여명이 살고 있다. 1949년에 입도한 김봉렴 할머니에 의하면 군산에서 범선을 타고 들어 왔는데 정기남씨 가족만 살고 있었다고 한다. 산 서사면에 빈집들이 있어 한 집을 택해 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1965년에 입도한 조현상씨에 의하면 염전을 만들기 위하여 입도를 하였는데 그때 7가구 10여명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7가구는 정재봉, 박기수, 배노수, 신봉남, 지종찬, 김영렬, 신상길 씨댁이다. 1965년도에 조남두, 조남호, 김관치, 서석형씨가 염전을 만들면서 노동인구 유입되어 350여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 후 1980년대 김 양식의 활성화와 수심원의 운영으로 인구가 늘었다가 일자리가 사라지자 급격하게 인구가 감소하였다.
교육
유부도의 유일한 공공기관은 송림초등학교 유부도 분교이다.
송림초등학교에서 파견된 선생님 2분이 5명의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2011년 현재는 학생수가 줄었다). 유부도 분교는 1973년 4월 1일 개교하여 현재까지 꾸준히 유부도 학생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교사 1동과 최근에 새로 지은 선생님 숙소 1동, 그리고 한때 인구가 많은 때 유부도 파출소가 있던 폐건물 1동이 있다. 운동장에는 유부도 특유의 식물이 자라고 있어 자연스런 잔디 구장이다. 주변에는 해당화가 담장을 이루고 있다. 김 양식이 활성화되었을 때는 단오를 즈음해 유부도의 날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바닷바람에 견뎌낸 흔적들이 역력한 학교 건물만큼이나 학생들의 꿈도 이곳에서 자랐을 것이다. 현재 재학 중인 영철이는 바다와 철새가 좋다고 하였다. 조사자의 바람이 있다면 유부도 분교에 근무하는 선생님께서 직접 유부도의 환경과 철새 그리고 주민들을 조사 연구하여 유부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교육이 이루어지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 유부도 분교 아이들 철새교육 |
▲ 송림초등학교 유부도 분교
종교
유부도에는 갈릴리 교회와 소망교회 2개가 있다. 갈릴리 교회는 1970년 한 전도사에 의하여 설립되었으며 소망교회는 주민 박창구씨의 딸 박경숙씨가 사역하고 있다. 갈릴리 교회에는 군산과 장항을 오고가는 배를 구입하여 운영하고 있다. 현재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교회 신자이다. 특별히 유부도에서 행해지는 종교 활동은 조사할 수 없었다. 단지 교회가 들어오기 전에는 조앙신이나 뱃고사 정도의 의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교통
유부도에서 장항이나 군산으로 나오거나 들어가려면 배를 이용하여야 한다. 1949년쯤 군산에서 유부도를 오고가던 배는 구명호씨가 범선을 가지고 썰물에 유부도에 왔다가 민물에 군산으로 나갔다. 그 배를 이용하여 생필품을 구입하고 군산을 오고가고 했다. 유부도에 오고가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고 구명호씨의 사정에 의하여 오고갔다. 구명호씨 덕분에 당시 군산으로 나갈 수 있어서 늘 고맙게 생각했다. 그 후 손희철씨가 돛단배(風船)를 운영하여 군산을 오고갈 수 있었다. 배삯(船費)은 어장하는 사람들이 잡은 생선을 주었다. 당시 사람들이 잡았던 생선은 중하, 꽃게, 대하, 숭어, 전어 등이었다. 중하는 주로 뗏마(木船)를 이용하여 잡았다. 신상길씨가 운영하던 유복호라는 기계배가 운영되었다.
1970년대부터 1985년도까지 유부도에 인구가가 급격하게 증가하자 “새마을 13호”라는 배가 운행되었다. 군산항을 출발하여 장항도선장을 경유하여 유부도에 왔다. 그리고 개야도를 돌아서 다시 유부도, 장항, 군산을 왕복 운행하였다. 한때는 수심원에서도 수심원 가족들을 운송하기 위하여 수심원 전용 “수심호”가 있었다. 당시 환자 가족, 직원, 그리고 생필품을 실어 나르는 역할을 하였다.
최근에는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이 가구당 배를 마련하여 운항하고 있다. 없는 사람들은 배를 소유한 사람들의 일정에 맞춰 군산과 장항을 오고간다. 유부도에 들어가려면 배를 가진 사람에게 사전에 연락을 하여야한다.
▲ 장항에서 출발해 유부도로 가는 선외기
전기, 물, 쌀
얼마 전까지 유부도에는 3가지가 없었다. 술집, 물, 전기가 없는 3무 마을이었다. 지나친 음주가 마을 공동체를 붕괴시킨다고 하여 마을회의에서 술을 개인적으로 육지에 나가 사다먹을 수 는 있어도 유부도 내
▲ 유부도 발전소 |
다음으로는 유부도에 전기, 물, 쌀이 없어 불편하였다. 최근에 발전기를 설치하여 전기를 자가 발전하여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발전기를 돌려야 하기 때문에 기름을 장항에서 늘 가져와야 한다. 기름을 장항에서 가져오면 발전기가 있는 곳까지 운반하는 것은 많은 주민들의 협조가 필요하다. 그러나 선착장에서 발전실까지 운반하는 일은 매우 불편하게 하고 있다. 추운 날 기름을 운반하는 일은 너무나 가혹한 작업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마을 사람들의 안녕을 위하여 서로 봉사를 하고 있다.
물은 2009년 상수도를 설치하여 이만저만 편리한 것이 아니다. 그 이전에는 장항에서 배로 운반하여 갖다 먹었다. 지금은 자체 상수원을 마련하여 물을 공급하고 있어 너무나 편리한 생활을 하고 있다.
유부도의 농작물은 채소가 될 뿐이다. 고추, 고구마, 감자, 배추, 시금치 등 채소가 생산될 뿐 벼농사는 짓지 못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주식은 쌀과 보리는 대개 군산이나 장항에서 구입하였다. 어장을 통하여 잡힌 물고기를 내다팔아 주식인 쌀이나 보리를 얻을 수 있었다.
유부도의 가옥 “떼집”
유부도 떼집에는 지금 김정원씨가 살고 있는 집이다. 떼집은 유부도의 가옥을 잘 이해 할 수 있는 특징을 갖고 있다. 1973년에 입도한 김정원씨는 어장을 경영하였는데 살 집이 없어 직접 전통 방식으로 떼집을
▲ 김정원씨가 1974년 입도해 지은 떼집 전경 |
지금은 스레이트 지붕과 시멘트로 벽을 발랐지만 그 구조는 그대로 남아 있다. 떼집은 벽돌을 만들 수 없었던 유부도에서 떼를 벽돌처럼 떠서 싸 올린 벽에 지붕을 올린 집이다. 유부도의 환경과 생태적인 삶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앞으로 보존 가치가 있다
11. 2. 10.
11. 2. 6.
딱따구리
작년에 수리부엉이를 본 적이 있어 혹시나 하고 이틀동안 찾아갔다. 절벽을 따라서 둘러보긴 했는데 수리부엉이나 번식 흔적은 찾아 볼 수가 없다. 대신 딱따구리가 나무 쪼는 소리가 들려 주변을 한동안 살펴보니 쇠딱따구리, 오색딱따구리, 큰오색딱따구리가 보인다.
물새류는 어찌보면 산새에 비해 관찰하기가 양호한 편이다. 우리나라에 오는 물새류 종류와 지역은 한정돼 있고 관찰하는데도 그리 어렵진 않다.
반면 산새들은 관찰하기가 쉽진 않은데 주구장창 다니는 수 밖에 없고 운이 좌우를 많이 하는 편이다.
사실은 운은 아니고 산을 돌아보면 나무의 종류나 계곡, 지형, 뭐 이런 것들을 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산에서는 나무가 우거져 새를 쉽게 볼 수 없기 때문에 소리가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딱따구리는 종마다 드러밍하는 소리가 서로 다르다. 큰오색딱따구리는 굵직한 소리가 나고 울음소리는 히잇~(내게는 이렇게 들린다)한다.
큰오색딱따구리(White-backed Woodpecker)
드러밍(drumming)
나무는 죽어가면서도 누군가에게 또 하나의 생명을 이어준다.
쇠딱따구리(Japaness Pygmy Woodpecker)
딱따구리류중 가장 작은데 이녀석은 낯가림이 심하진 않다. 가까이 가도 잘 도망가진 않는다.
울음소리는 찌리리~(내게는 그렇게 들린다)
나무를 쪼는데 큰오색딱따구리가 쪼는 소리와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물새류는 어찌보면 산새에 비해 관찰하기가 양호한 편이다. 우리나라에 오는 물새류 종류와 지역은 한정돼 있고 관찰하는데도 그리 어렵진 않다.
반면 산새들은 관찰하기가 쉽진 않은데 주구장창 다니는 수 밖에 없고 운이 좌우를 많이 하는 편이다.
사실은 운은 아니고 산을 돌아보면 나무의 종류나 계곡, 지형, 뭐 이런 것들을 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산에서는 나무가 우거져 새를 쉽게 볼 수 없기 때문에 소리가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딱따구리는 종마다 드러밍하는 소리가 서로 다르다. 큰오색딱따구리는 굵직한 소리가 나고 울음소리는 히잇~(내게는 이렇게 들린다)한다.
큰오색딱따구리(White-backed Woodpecker)
드러밍(drumming)
나무는 죽어가면서도 누군가에게 또 하나의 생명을 이어준다.
쇠딱따구리(Japaness Pygmy Woodpecker)
딱따구리류중 가장 작은데 이녀석은 낯가림이 심하진 않다. 가까이 가도 잘 도망가진 않는다.
울음소리는 찌리리~(내게는 그렇게 들린다)
나무를 쪼는데 큰오색딱따구리가 쪼는 소리와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11. 2. 4.
11. 2. 2.
우리집 소가 구제역 피해간 비법은?
펀 글입니다!
"햇빛 한 번 못보고 죽는 소·돼지, 소독만으론 구제역 못 막아"
[토론회] 친환경 축산!"우리집 소가 구제역 피해간 비법은?"
'재앙' 수준의 구제역 사태를 계기로 '지속가능한 축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280만 두의 가축을 살처분으로 내몬 구제역 사태의 책임은 1차적으로 정부의 허술한 방역 대책에 있지만, 낙후된 동물 복지와 공장식 밀집 사육이 이번 사태와 같은 가축 전염병의 전국적인 창궐을 낳았다는 지적이다.
특히 구제역, 조류인플루엔자(AI) 등 전염병의 발생 빈도 역시 점차 높아지는 상황에서 가축 면역력을 키우는 '유기 축산'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28일 가톨릭농민회·한국유기농업학회·환경농업단체연합회 등 농민단체 주최로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열린 '지속가능한 축산 방향 모색 토론회'에서는 이미 유기 축산을 시행 중인 농가들의 다양한 사례가 소개됐다.
"태어나서 햇빛 한 번 못보고 죽는 소·돼지 대다수"
경기도 파주에서 농장 '자연농업 이장집'을 운영하며 돼지 50여 마리를 키워온 김정호 씨는 "과연 현대 축산업을 하는 농가들이 여태까지 소독을 하지 않고, 약을 쓰지 않아서 이번 구제역 사태가 발생했느겠냐"고 반문했다. 그는 "가축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해선 소독도 중요하지만, 가축 면역력을 키우지 않으면 한계가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김 씨는 "국내에서 사육되는 가축들은 대부분 수입 곡물, 그것도 유전자 변형 곡물(GMO)에 의존한 채 햇빛조차 들지 않은 축사에서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길러지고 있다"며 "이런 방식의 축산으론 가축의 면역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가축 면역력을 키우기 위한 방법으로 △가축이 흙을 밟고 다니게 할 것 △햇빛이 드는 방목장을 만들고 가축을 풀어놓을 것 △축사에 벽을 없애고 공기 소통이 잘 되게 할 것 △축사 안에 햇빛이 잘 들어오게 할 것 △GMO 곡물배합사료를 적게 먹일 것 △수입건초를 줄이고 우리나라 풀을 먹일 것 △인공수정을 줄이고 자연교배 시킬 것 등을 제안했다. 기본적으로 가축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줘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사육 두수 자체를 줄이는 것이 필수다.
강원도 철원에서 친환경 방식으로 소 11마리를 키우고 있는 정농회 회장 김준권 씨 역시 이 일대를 휩쓴 구제역을 피해갈 수 있었다. 그는 "소독이 구제역을 막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우리 집 소들은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라며 "소독은 최소한의 방법이지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무엇보다 친환경 축산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고기 생산 위주로 육종을 하다 보니 질병 저항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국내 축산업의 현실"이라며 "태어나서 햇빛 한 번 보지 못하고 죽는 소·돼지들이 대부분인 상황에서, 축사에 통풍을 잘해주고 햇빛을 들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질병 면역력을 높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최근 화두로 떠오른 '동물 복지'가 인간의 삶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 권영근 소장은 "가축의 생리적 본능을 인간이 폭력을 제압하는 것이 현대 축산의 기술"이라며 "가축 복지의 수준은 먹을거리의 안전성, 품질 향상과도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으며, 가축의 건강과 복지의 수준이 인간의 건강과 복지의 실현을 보증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친환경 축산, '소비자의 변화' 없이는 불가능"
일반 축산에 비해 생산자가 일부 희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친환경 축산'을 위해선 생산자-소비자 사이의 협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가톨릭농민회에선 '자급 퇴비 마련을 위한 암송아지 보내기 운동'을 몇 년 째 진행하고 있다. 공장식 축산이 아닌 '전통 방식'으로 소를 키우고, 생산자가 안전하게 키운 소를 도시와 농촌이 함께 나누는 운동이다.
안동가톨릭농민회의 경우, 농가가 도시의 성당이나 단체로부터 지원받은 암송아지 구입 자금으로 2~3마리의 송아지를 구입해 전통 방식으로 키운다. GMO 배합사료 대신 무농약 볏집, 쌀겨 등 농업부산물로 만든 안전한 자가 사료를 먹이고, 소를 키우며 나오는 소똥을 발효시켜 우량 퇴비를 만든다. 이 퇴비는 유기농업을 하는 농민들이 받아 친환경 농산물을 생산하는데 쓰고, 이렇게 생산된 쇠고기와 농산물은 다시 도농결연 직거래를 통해 지원을 한 소비자들에게 돌아간다.
이 방식으로 한우 30마리를 키우고 있는 안동가톨릭농민회 이상식 씨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먹는 쇠고기는 유전자 조작 옥수수와 각종 항생제, 성장호르몬으로 오염된 다국적 농기업의 수입 사료를 먹여 대규모로 키워진 소"라며 "오염된 수입 사료를 먹고 자란 쇠고기가 소비자의 건강에도 좋지 않다는 공감이 안전한 농산물을 만드는 '도농 협력형 유기순환 생산체계'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 씨는 "농민 입장에서 유기농을 한다는 것은 편리함과 소득 감소 등 여러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라며 "그렇게 힘든 과정을 뚫고 생산된 농축산물을 사주는 대상이 있지 않으면 선순환의 고리가 완성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안인숙 고양여성민우회생협 이사장 역시 "구제역 사태로 공장식 축산에 대한 문제의식이 일고 있지만, 소비자의 변화 없이는 생산자의 변화도 추동할 수 없다"며 "안전하게 생산된 먹을거리를 소비자와 생산자가 얼굴을 맞대며 직거래 하는 방식이 앞으로의 대안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프레시안에서 /선명수 기자
"햇빛 한 번 못보고 죽는 소·돼지, 소독만으론 구제역 못 막아"
[토론회] 친환경 축산!"우리집 소가 구제역 피해간 비법은?"
'재앙' 수준의 구제역 사태를 계기로 '지속가능한 축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280만 두의 가축을 살처분으로 내몬 구제역 사태의 책임은 1차적으로 정부의 허술한 방역 대책에 있지만, 낙후된 동물 복지와 공장식 밀집 사육이 이번 사태와 같은 가축 전염병의 전국적인 창궐을 낳았다는 지적이다.
특히 구제역, 조류인플루엔자(AI) 등 전염병의 발생 빈도 역시 점차 높아지는 상황에서 가축 면역력을 키우는 '유기 축산'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28일 가톨릭농민회·한국유기농업학회·환경농업단체연합회 등 농민단체 주최로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열린 '지속가능한 축산 방향 모색 토론회'에서는 이미 유기 축산을 시행 중인 농가들의 다양한 사례가 소개됐다.
"태어나서 햇빛 한 번 못보고 죽는 소·돼지 대다수"
경기도 파주에서 농장 '자연농업 이장집'을 운영하며 돼지 50여 마리를 키워온 김정호 씨는 "과연 현대 축산업을 하는 농가들이 여태까지 소독을 하지 않고, 약을 쓰지 않아서 이번 구제역 사태가 발생했느겠냐"고 반문했다. 그는 "가축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해선 소독도 중요하지만, 가축 면역력을 키우지 않으면 한계가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김 씨는 "국내에서 사육되는 가축들은 대부분 수입 곡물, 그것도 유전자 변형 곡물(GMO)에 의존한 채 햇빛조차 들지 않은 축사에서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길러지고 있다"며 "이런 방식의 축산으론 가축의 면역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가축 면역력을 키우기 위한 방법으로 △가축이 흙을 밟고 다니게 할 것 △햇빛이 드는 방목장을 만들고 가축을 풀어놓을 것 △축사에 벽을 없애고 공기 소통이 잘 되게 할 것 △축사 안에 햇빛이 잘 들어오게 할 것 △GMO 곡물배합사료를 적게 먹일 것 △수입건초를 줄이고 우리나라 풀을 먹일 것 △인공수정을 줄이고 자연교배 시킬 것 등을 제안했다. 기본적으로 가축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줘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사육 두수 자체를 줄이는 것이 필수다.
강원도 철원에서 친환경 방식으로 소 11마리를 키우고 있는 정농회 회장 김준권 씨 역시 이 일대를 휩쓴 구제역을 피해갈 수 있었다. 그는 "소독이 구제역을 막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우리 집 소들은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라며 "소독은 최소한의 방법이지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무엇보다 친환경 축산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고기 생산 위주로 육종을 하다 보니 질병 저항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국내 축산업의 현실"이라며 "태어나서 햇빛 한 번 보지 못하고 죽는 소·돼지들이 대부분인 상황에서, 축사에 통풍을 잘해주고 햇빛을 들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질병 면역력을 높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최근 화두로 떠오른 '동물 복지'가 인간의 삶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 권영근 소장은 "가축의 생리적 본능을 인간이 폭력을 제압하는 것이 현대 축산의 기술"이라며 "가축 복지의 수준은 먹을거리의 안전성, 품질 향상과도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으며, 가축의 건강과 복지의 수준이 인간의 건강과 복지의 실현을 보증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친환경 축산, '소비자의 변화' 없이는 불가능"
일반 축산에 비해 생산자가 일부 희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친환경 축산'을 위해선 생산자-소비자 사이의 협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가톨릭농민회에선 '자급 퇴비 마련을 위한 암송아지 보내기 운동'을 몇 년 째 진행하고 있다. 공장식 축산이 아닌 '전통 방식'으로 소를 키우고, 생산자가 안전하게 키운 소를 도시와 농촌이 함께 나누는 운동이다.
안동가톨릭농민회의 경우, 농가가 도시의 성당이나 단체로부터 지원받은 암송아지 구입 자금으로 2~3마리의 송아지를 구입해 전통 방식으로 키운다. GMO 배합사료 대신 무농약 볏집, 쌀겨 등 농업부산물로 만든 안전한 자가 사료를 먹이고, 소를 키우며 나오는 소똥을 발효시켜 우량 퇴비를 만든다. 이 퇴비는 유기농업을 하는 농민들이 받아 친환경 농산물을 생산하는데 쓰고, 이렇게 생산된 쇠고기와 농산물은 다시 도농결연 직거래를 통해 지원을 한 소비자들에게 돌아간다.
이 방식으로 한우 30마리를 키우고 있는 안동가톨릭농민회 이상식 씨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먹는 쇠고기는 유전자 조작 옥수수와 각종 항생제, 성장호르몬으로 오염된 다국적 농기업의 수입 사료를 먹여 대규모로 키워진 소"라며 "오염된 수입 사료를 먹고 자란 쇠고기가 소비자의 건강에도 좋지 않다는 공감이 안전한 농산물을 만드는 '도농 협력형 유기순환 생산체계'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 씨는 "농민 입장에서 유기농을 한다는 것은 편리함과 소득 감소 등 여러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라며 "그렇게 힘든 과정을 뚫고 생산된 농축산물을 사주는 대상이 있지 않으면 선순환의 고리가 완성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안인숙 고양여성민우회생협 이사장 역시 "구제역 사태로 공장식 축산에 대한 문제의식이 일고 있지만, 소비자의 변화 없이는 생산자의 변화도 추동할 수 없다"며 "안전하게 생산된 먹을거리를 소비자와 생산자가 얼굴을 맞대며 직거래 하는 방식이 앞으로의 대안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프레시안에서 /선명수 기자
11. 2. 1.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
스티븐 로우즈, 리처드 르원틴/한울
요즘은 전에 읽었던 책들을 들여다 보고 있다. 기억력이 바닥이라 얼마전에 읽은 것도 몇일 지나면 아리송하다.
이 책은 지금 세번째 읽었는데 처음은 뭔 말인지 이해가 잘 안됐다. 처음 읽을 때는 내용 중에 여러인물들을 그려 넣었는데 누군지도 잘 모르겠고 대충 봤다.
지금도 자세한 의미를 이해한 건 아니고 몇년이 지나니 '흐름'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다.
과거 중세 신중심사관에서 르네상스(인간중심)시대를 거쳐 브루주아와 산업혁명의 시대를 만나게 되는데 1859년 다윈의 '종의 기원'은 역사의 큰 획을 긋게 된다. 이후 1950년대 DNA 염기서열을 발견한 왓슨, 크릭을 시대를 계기로 진화생물학의 급격한 성장과 토대를 다지게 된다.
그 사이에 슈뢰딩거와 같은 훌륭한 물리학자(개인적으로는...)가 있긴 한데 '생명이란 무었인가'로 다윈의 진화론에 한계와 문제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계기를 이후 과학자들에게 영향을 준 걸로 알고 있다. 요즘에 이 양반에게 푹 빠져 있다.
'유기체는 음의 엔트로피를 먹는다', '질서로부터의 질서', '무질서로부터의 질서', 이 말에 뻑 갔다.
다윈 이론의 핵심은 돌연변이와 자연선택, 적응, 그리고 후세유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다윈은 그런 생각이 없었더라도 이후에 유전학적 특성을 인간사회에 적용시키면서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생각이 든다. 진화론을 잘못 받아들이면서 나타난 폐해가 많긴 한데 백인우월주의나 인종차별, IQ의 유전적 특권, 민족사회주의로는 나치즘이나 파시즘 같은 것들을 쉽게 역사에서 볼 수 있다.
동아시아에 미친 사회적 영향을 보자면 박노자가 쓴 '우승열패의 신화'에서 사회진화론자로 영국의 스펜서, 중국의 량치차오(나중에는 정신차렸다는 얘기도...), 일본의 가토 히로유키와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퍼져 나갔고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근대에 들어 유교가 쇠퇴하면서 개화기 때 '신지식인'들이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이동인, 김홍집, 김옥균, 박영효, 유길준, 윤치호, 서재필 같은 사람들이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지식인들이 사회진화론에 빠질수 밖에 없는 게 유렵제국주의가 동아시아에 미쳤던 막강한 영향력을 보면서 닫혀있었던 동아시의 부흥을 위해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를 극복한 사람이 만해 한용운같은 분이다.
과학자들이 가장 잘 빠질 수 밖에 없는 게 '환원주의'다. 통섭으로 유명한 에드워드 윌슨(생물학, 유전학, 동물행동학 등 많은 과학자들이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같은 경우 지금은 좀 달라진 것 같은데 통섭을 얘기하면서 결과적으로는 환원주의로 귀화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제일 싫어하고 빠지지 않으려고 하는 게 환원주의다.
이 책은 다윈의 유명한 후세들(과학적 자식들)은 대단히 많은데 그 중에 특히 에드워드 윌슨에 대해 실랄하게 비판한다. 사회생물학의 원조 하면 에드워드 윌슨이라 할 수 있는데 이를 비롯해 사회생물학자에 대해까지 실랄하게 비판한다.
조류를 연구하는 생물학자들을 보면 많은 경우가 '진화론'을 토대로 하고 있다. 그래서 가끔 보면 생물학자들이 환원주의 과학으로 빠지는 경우를 본다.
생물체라는 게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인지, 환경에 의해 변화가 되는 것인지, 아니면 서로 상호작용을 하는 것인지....
'보이는 것만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갈증이 있는 사람'들과의 싸움은 앞으로도 계속될 수 밖에 없지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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